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1세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 [include(틀:역대 프랑스 왕비)] [[파일:Eleanor of Austria.jpg|width=400]] 프랑수아 1세의 두 번째 왕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미남왕' [[펠리페 1세|필리프]]와 카스티야의 여왕 [[후아나 1세(카스티야)|후아나]] 사이의 장녀였다. 어머니인 후아나는 아버지 필리프가 사망한 이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형제들은 [[페르디난트 1세]]와 막내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카탈리나]]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마르가레테]][* [[샤를 8세]]와 약혼했던 그 마르가레테.]의 손에서 자랐다. 엘레오노르는 이모부였던 [[포르투갈 왕국]]의 왕 [[마누엘 1세]]의 세 번째 왕비가 되어 2명의 자녀를 낳았다. 아들은 일찍 사망했고, 딸인 인판타 마리아는 결혼하지 않고 50대에 사망했다.[* 인판타 마리아는 혼인 적령기 당시 가장 부유한 신부였다고 소문이 났지만 결국 결혼하지 않았다.] 첫 번째 남편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20대 초반의 엘레오노르는 다시 남동생 [[카를 5세]]가 있는 궁정으로 딸과 함께 돌아왔다. 황제의 큰누나인 엘레오노르는 좋은 정략 결혼 상대였기 때문에 카를 5세는 간을 봤고, 결국 10년 후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마드리드]]에 잡혀와 있던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와 재혼하게 된다. 당시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어린 시절 프랑스 왕실에서 미래의 왕비로 지냈던 엘레오노르의 고모 마르가레테의 협약으로 혼인이 결정되었고, 이것을 '귀부인들의 협약'이라고 한다. 엘레오노르는 딸을 두고 프랑스로 가게 되었는데 자존심이 강했던 프랑수아는 굴욕적인 혼인에 매우 기분이 상했고, 결혼 생활 내내 왕비를 푸대접했다.[* 왕비가 처음 궁으로 오는 날에 애첩이랑 테라스에서 히히덕거리면서 본다든지...] 하지만 엘레오노르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하며, 의붓아들인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결국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고, 프랑스의 궁정에서 후계자가 없는 왕비는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외롭게 살다가 남편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한 이후 다시 동생 카를 5세에게 돌아왔다. 이후 어린 시절 두고 온 딸 인판타 마리아에게 함께 살자고 했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오래 살았던 딸은 어머니와 동거하기를 거부했고, 딸을 만나고 오는 길에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